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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스크랩] 마더 데레사, 그칠 줄 모르는 사랑

출처 블로그 > himammo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himammo/80008259418

마더 테레사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

 


 
Mother Teresa (Agnes Gonxha Bojaxhiu)
 
 
 

사람들은 불합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비논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일을 하면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성실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내 일은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들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줘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채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어라.

 

- 마더 테레사의 말씀 -

 

 

 

 


 

마더 테레사 (1910 ~ 1997)

 

그칠줄 몰랐던 마더 테레사의 그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불리워졌던 마더 테레사의 생애를 소개 한다.

 

 

 

 


 

부르심속의 부르심

 

마더 테레사는 19l0년 8월27일에 유고슬라비아의 한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아그네스 곤히아 브락스히야」(Agnes Gonxha Bejaxhiu)였다. 그녀의 가계는 알바나아에서 유고슬라비아로 이주해 온 농민집안이었는데 생활은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국립국민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그녀의 가슴속에는 신앙심이 무럭무럭 움텄다. 열 두살 때엔 어떤 신심회에 가입했는데, 학교는 비 가톨릭계였지만 이 신심회를 지도하는 신부가 있어서 많은 감화를 받았던 것 같다.

 

그후 유고의 예수회에서는 인도선교를 위해 제1진을 1925년에 캘커타에 파견한 바 있었다. 그 중 한 회원이 벵갈에서 네팔인을 상대로 펼친 선교활동을 감동적으로 적은 편지를 자주 모국으로 보내주었으므로 그것이 신심회 회보에 실리기도 했다. 이 글을 통해서 어린 소녀는 장래에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사회사업에 매진하는 사도직을 꿈꾸게 되었다.

 


 
수녀님의 젊은 시절 모습
 
 
 

성장해 가면서 자기도 어떻게 인도로 건너가 볼 수 없을까 하고 수소문하던 차에, 마침 본부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두고서 벵골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로레토 수녀회로부터 입회 권유가 왔다. 그녀는 이것을 첫 번째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여기고 이에 순응하여 수녀회에 가입, 영어를 익힌 다음 수녀가 되는 수련을 밟고자 인도로 건너갔다.

 

나이 만 19세가 된 1929년 1월, 히말리야 산록에 위치한 다르엘령의 수도원이 첫 수련장이어서 거기에 체류케 되었다. 이로부터 만 2년의 수련기간을 거친 끝에 수녀가 되기 위한 첫 서약인 「유기허원」 을  한 후 로레토 수도회에서 운영하던 캘커타 동부지역 엔탈리에 위치한 성 마리아 여고로 부임했다. 그곳에 재직하면서 6년 뒤인 1937년에 종신허원을 함으로써 신앙적으로 하느님과 영원히 결혼한 몸이 되었다.

 

36세 때이던 l943년은 그녀의 생애에서 하느님의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해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지난 17년간을 낮선 이국 땅, 그것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빈한한 대도시 캘커다의 가톨릭계 학교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며 수녀의 삶을 살아왔다. 이 동안에 학교장으로 봉직했는가 하면 학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인도 방인수녀회인 성안나 수녀회의 수련장을 맡기도 했다.

 

이따금씩 그녀는 캘커다 시 어느 곳에나 산재한 빈민촌을 두루 돌아볼 기회를 가졌었다.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는 노인이나 병약자들이 밤사이에 층계나 남의 접 처마 밀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게 예사였다. 상처 입은 여인은 환부에 구더기가 득실거린 채 숨을 헐떡이며 노변에 누워 있고, 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성이 문란해진 청소년 계층의 무분별한 동거생활로 신생아들이 골목골목의 쓰레기통에서 수거되기가 일쑤였다.

 

이런 참상을 애타게 생각하던 그해 9월 「테레사」수녀는   피정을 받으러 다르엘링으로 가던 기찻간에서 문득 하느님의 계시를 들었다. 테레사 수녀는 이것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말했다.

 

 


 

 

 

"부르심이 뜻하는 것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내가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나의 소명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는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주어지는 일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테레사는 종신허원을 한 수녀였으므로 수도회를 탈퇴하기 위해선 교회법상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수도회 소속의 수녀가 바깥세계로 뛰어들어 봉사하는 재속수녀가 되려면 먼저 소속회 원장의 동의를 구해야하고, 소속 교구인 캘커타 대주교에게 청원을 거쳐 최종적으로 바티칸교황청의 허락을 얻어야만 한다. 그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로레토 수도회 수도복을 벗고 빈민과 기아,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사랑의 선교회」창설을 목적으로 흘로 거리를 향해 뛰쳐나왔다.

 

그녀는 앞날을 대비하여 3개월간 간호학을 배운 경험을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단신으로 1948년 12월 20일, 모티즈힐 빈민촌에 찾아갔다. 빈민가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 테레사 수녀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학교를 열고 싶다는 테레사 수녀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꼭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에게는 칠판도 분필도 살 돈이 없었고, 학생들 또한 공부에 필요한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했다. 테레사 수녀가 모티즈힐을 찾은 둘째 날엔 이미 5명의 어린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웅덩이 근처의 나무 아래서 자신이 세운 최초의 학교를 열었다. 테레사 수녀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말해주었다.

 

"주운 조그만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자를 썼습니다. 어린이들은 허리를 굽혀 땅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학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2월 28일, 학생 수는 이미 28명에 이르렀다. 1949년 1월 4일, 이 날엔 기쁜 일이 더 많았다. 3명의 교사가 돕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학생들의 수도 56명으로 늘어났다.

 

 


 
테레사수녀가 설립한 인도의 고아원
 
 
 
테레사 수녀는 학교 외에 진료소를 열고 싶었다. 이미 병자들의 간호에 나서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진료소를 열고 싶었다. 캘커타에는 결핵과 나병, 그리고 온갖 질병이 만연해 있었다. 가는 곳마다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테레사 수녀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병원에 데려다 주어 진료를 받게 했다. 그러나 환자가 너무 많아 모든 환자들에게 의사의 진료를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약을 주는 것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환자도 많았으나 필요한 약을 나누어주는 곳은 없었다.
 
테레사 수녀는 마침내 진료소를 열고 치료도 해주고 약도 나누어주었다. 예상대로 파트나의 수녀들이 의사와 도울 사람을 보내 주었고, 성 마리아 학교에서도 두 사람의 교사가 찾아와 돕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사나 의사의 도움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때도 있었다. 봉사에 나선 사람들이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슬럼에서의 일에만 전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하느님에게 봉사한다는 강한 신념이 없으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테레사 수녀는 점점 더 절실히 느꼈다
 
"이 일을 오래 계속하기 위해서는 등뒤에서 밀어줄 힘이 필요하다. 신앙생활만이 그러한 힘을 줄 수 있다."
 
 
 

 
눈을 감고 있는 테레사수녀
 
 
 
 
 

사랑의 선교회의 탄생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가 운영하는 '성 요셉 노인의 집'에 임시 거처를 두고 모티즈힐과 틸잘라 빈민가에서 학교와 진료소를 열어 활동하고 있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살고 일할 독자적인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참에 1949년 2월 28일 크리크 레인 14번지에 있는 고메스의 집 3층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크리크 레인으로 이사온 지 3주가 지난 후 테레사 수녀는 최초의 협력자를 만나게 되었다. 옛날의 제자로 스바시니 다스(Subashini Das)가 찾아온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당시 학생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수업이 없는 토요일 오후에는 실제로 봉사활동 그룹을 만들어 실천하게 했다.

 

이 가르침에 따라 학생들은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고 빈민가에서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스바시니 다스는 그런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홀로 외롭게 일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할 첫 입회자이며 협력자를 맞게 되어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또 한 사람의 협력자가 찾아왔고 테레사 수녀와 뜻을 함께 하는 자매들의 수가 마침내 10명이 되었다. 거의 모두가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었다. 테레사 수녀와 그 자매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기 위해 식량과 음식을 구하러 다녔다.

 

1950년 초 페리에 대주교는 테레사 수녀가 이끄는 회의 활동을 승인하고 캘커타 대교구 산하의 새로운 수도회로 인가했다. 테레사 수녀와 그 자매들의 모임이 정식 수도회로 발족되기 위해서는 회헌이 필요했다. 테레사 수녀는 수도회의 이름을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로 정하고, 275조의 회헌을 마련하였다.

 

 


 
 
 
 
"우리들의 목적은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의 한없는 갈증을, 사람들의 사랑의 갈증을 풀어드리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권고를 지키며, 회헌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봉사한다. 우리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예수님에게 봉사하며 이들이 하느님 닮은 보습을 되찾도록 일한다.
 
창립이래 사랑의 선교회는 자신들의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말을 되새기고 있으며, 그래서 이 말은 선교회의 모원과 지원곳곳에 걸려 있다. 사랑의 선교회는 또한 일반 수도회들이 지키는 3가지 서원, 즉 '청빈'과 '정결'과 '순명'외에 하나의 서원을 더 했다.
 
4번째 서원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1950년 10월 7일 새로운 수도회 '사랑의 선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인가가 내렸다. 테레사 수녀와 젊은 자매들은 더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사랑의 선교회'의 회헌은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했으므로 이날부터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가 되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니르말 흐리다이)

 

1952년 문을 연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은 '사랑의 선교회'가 벌인 최초의 큰 일이었다. 마이클 고메스는 이 새로운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어느 날 우리들의 집 가까이 있는 캠프벨 병원(Cammpbill Hospital) 근처의 길가에서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병원에 부탁해 보았지만 환자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어 약방에 가서 약을 사 가지고 돌아와 보니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

 


 

 

 

개나 고양이도 이처럼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보다도 자기의 애완동물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고 마더 테레사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말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경찰 당국자를 찾아가 이런 비참한 실정을 호소했고, 그것이 결국은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이 되었습니다."

 

인도가 분할된 후 캘커타에는 난민이 넘쳐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누구로부터도 버림받아 비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더 테레사는 결심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더러운 도랑 속에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해서는 안된다"고.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모티즈힐에 방을 빌려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보살펴 주기로 했다.

 

이 집을 '니르말 흐리다이'(Nirmal Hriday), 즉 성모의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로 이름지었다. 그래서 이 집은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이라고도 했고, '칼리가트'라고도 했으며 '니르말 흐리다이'라고도 불리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이 열린 초기에는 수녀들이 온갖 정성을 다 쏟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1955∼56년쯤 되어서는 가까스로 반 수 정도가 살아 남았고, 그 후에는 살아서 나가는 사람들의 수가 죽는 사람들을 넘어서게 되었다. 누더기처럼 되어 악취가 나는 몸을 씻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미사를 드리는 동안에 신부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얼마나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만지는가를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꼭 그와 같이 하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비참한 모습을 하고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10만 명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곳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고 살아나기도 했고 또는 죽어가기도 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한 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접받고 있으며, 사람으로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더 하우스

 

'사랑의 선교회'에 참가하는 자매들이 늘어남에 따라 크리크 레인에 있는 3층의 방들은 매우 비좁아졌다. 마더 테레사는 옥상에까지도 방을 만들었지만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선교회로 찾아와서 팔려고 내놓은 적당한 건물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마더 테레사를 로우어 서큘라 로드 54a 번지에 있는 그 집으로 안내하여 주인을 만나게 해 주었다. 집주인은 "이 집은 신이 나에게 주신 것인데 나는 그것을 다시 신에게 돌려드린다"고 말했다.

 

사랑의 선교회는 이 집에 마더 하우스(Mather House, 모원(母院))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집은 그 이후 선교회의 활동 중심이 되어 자매들과 고락을 함께 해왔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곳으로 이사온 1953년 당시만 해도 이 건물이 40년 뒤 인도와 세계 1백 20여 개국 이상에서 성스러운 활동을 벌이는 세계적인 조직의 중심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콜카타 죽음의 집 (마더 테레사하우스)
 
 
 
사랑의 선교회의 수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3벌의 사리와 튼튼한 신발, 그리고 조그만 십자가, 묵주, 금속으로 만든 얇은 접시, 이런 것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리는 거의 언제나 해져 있었다. 마더 테레사의 사리가 대표적인 예인데, 사람들은 찢어진 곳을 수선한 자국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마더 테레사는 일을 하는데 가난은 필수적인 조건이라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불평한다면 우리도 같은 것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고통 없이 일한다면 우리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같은 정신에서 세탁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호의도, 정전에 대비해 발전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제안도 모두 거절했다. 전화만은 여러 사람의 설득으로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한 대만을 쓰기로 하였다.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시슈 브하반)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을 연 이후 마더 테레사는 의지할 곳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 집 없이 떠도는 어린이들, 길가에, 도랑에,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아이들, 회복하기 어려운 병에 걸려 누구도 돌볼 수 없게된 아이들, 정박아, 장애아들...... 마더 테레사는 이들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가운데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그래서 1955년 사랑의 선교회 본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니르말라 시슈 브하반'(Nirmala Shishu Bhavan,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이란 뜻)을 열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니르말 흐리다이)을 연 지 3년 만이었다.

 

선교회는 캘커타에 '집'을 처음 연 이래 인도의 주요 지역에 '어린이들의 집'을 늘려 갔다. 이 집들은 미숙아나 병든 아이들을 주의 깊게 돌보고 간호해야 하므로 되도록 수도회 건물 가까이 두게 했다. 어린아이들의 수는 집의 크기에 따라 다른데, 가장 적은 곳은 20여 명, 많은 곳은 2백 명에 이르렀다.

 

 


 
어린이집을 방문한 마더 테레사
 
 
 
마더 테레사는 단 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더라도 어떤 아이든 이 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곧 죽어버릴 어린 아이를 위해 그렇게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자매들의 노력을 더 유효한 곳에 활용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록 몇 분 동안밖에 살지 못할 아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가운데 혼자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은아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어 가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어 그 사랑 속에서 최후를 맞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원치 않는 아이가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데려와 달라고. 결코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요."
 
 
 
 
 

평화의 마을, 샨티 나가르

 

마더 테레사가 나병환자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어느

출처 : 마더 데레사, 그칠 줄 모르는 사랑
글쓴이 : 법상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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